다산 정약용 선생의 삶과 저작과, 그의 평생을 통해 지녔던 가치들이 장장 육백 페이지에 숨 가쁘게 담겨져 있다. 그가 18년의 유배생활 중에 저술한 500권의 저서는 도저히 우리의 상상력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놀라운 업적이다.
이 책은 그의 이 불가사의한 업적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그 의문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게 해 주었다.
다산 선생이 지식에 접근하고, 가치의 진위를 판단하고, 분류정리하고, 후학들과 함께 공동작업하여 편찬하는 모든 지식의 경영법을 총 10강 50목 200결로 일목요연하게 정리해 놓았다. 이 책의 정리법도 다산의 이러한 지식경영의 방식과 닮아 있다.
다산선생의 학문전반을 관통하는 핵심 키워드는 '강구실용'이다. '쓸모를 따지고 실용에 바탕하라'는 것이다. 학문을 위한 학문을 철저히 배제하며, 나 자신을 발전시키고 그 힘으로 남까지 감염시키는, 세상에 도움이 되는 공부를 하라는 것이다.
다산이 지식을 다루는 법은 참으로 옳다.
지식의 겉껍질만 이리저리 맛보고 지나지 말고, 깊이 파고 들어 핵심을 잡아내라. 급한 마음에 대충 훝고 지나가는 것보다 한가지를 깊이 파고들어 그 핵심을 붙들게 되면 그것이 확장되어 주변 지식까지 터득할 수 있으니 그게 지름길이다.
공부는 가닥을 잡는 데서 시작되고 끝난다. 틀을 만들고 골격을 세워 정리하여 그 정보가 스스로 말하게 하라.
지나가는 생각을 붙들어 내 것으로 만들어라. 끊임없이 초록하고 메모하는 습관을 들여라.
쟁점이 뚜렷해지도록 질문하고 논란하고 지적하라. 이를 통해 모든 지식의 오류를 줄여 정확한 정보들로 만들어라.
탁상공론으로는 안 된다. 실제에 적용해서 힘을 발휘할 수 있어야 한다. 세상에 새로운 지식은 없다. 남의 좋은 것을 가져다가 나에게 적용하라. 무엇 때문에 이 일을 하는지, 어디에 소용되는지를 끊임없이 묻고 대답하라.
시비를 판별하는 냉철한 안목과 속셈을 두지 않는 공정한 시각을 갖추어, 스스로 주체를 확립하고 권위를 가질 수 있어야 한다.
혼자 다 할 수 있다는 생각을 버려라. 역할을 분배하여 효율성을 극대화 해야한다. 목표를 정해 실천하고, 한 작업을 중심에 놓고 진행하면서 동시다발적으로 다양한 작업을 병진시키라
학문과 인간이 따로 놀면 안 된다. 인간에 대한 따뜻한 마음, 자연의 정취에 마음을 기울여라.
역경에도 꺾이지 않는 불굴의 의지, 사람을 사랑하는 뜨겁고 붉은 마음, 진실과 실용을 추구하는 정신, 오직 나만이 할 수 있는 일에 매달리는 몰두, '지금 여기'를 중시하는 자주적 태도. 삶의 질문과 공부의 목적 앞에 늘 굳게 붙잡아야 할 핵심가치를 잊지 마라.
이러한 다산도 귀양지에 와서야 세상에서 허둥지둥 갈팡질팡 지냈음을 고백하며, 주막집 뒷방에 사의재라는 이름을 붙여놓고 생각은 담백하게, 외모는 장엄하게, 말은 적게, 행동은 무겁게 한다는 네 가지 마땅함을 지키겠노라고 다짐을 세웠다고 한다. 오히려 이 인생의 역경을 기회로 돌린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 민족의 오고온 세대에게 역사에 길이남는 문화유산을 남기고 민족의 발전에 길이 이바지하는 거대한 거목이 되실 수 있었던 것이다.
나는 다산선생의 지식경영법을 숨가쁘게 읽어오면서 의문이 하나 생겼다. 다산과 그 당대의 우리 선진들이 읽고, 깊이 생각하고, 연구하고, 토론과 논쟁을 통해 오류를 걸러내고 지식의 정수를 취하는 이 수준 높은 학문연구의 유산이 어찌하여 오늘날 우리 시대는 깡그리 잃어버린 것일까? 얄팍하고 가볍고 손쉬운 교육방법들이 이토록 성행하게 된 것일까? 참으로 안타까운 마음이 드는 것이다.
나는 이 두꺼운 책의 마지막 장을 덮으며 그의 위대함과 엄중함 앞에 두 손을 포개었다. 감동과 두려움과 또한 그 위대한 유산을 잃어버린 후손의 송구함이 어우러진 복잡한 마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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