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강가 단상

직장내 여직원 공주과와 머슴과 있다.

안동꿈 2010. 1. 25. 10:49

사실 이런류의 단정적인 제목은 진실성을 매우 약화시킨다. 뭐랄까 누군가에게 반박의 여지를 여실히 드러내 놓는다고나 할까. 소심한 내겐 도박적인 색채의 이런 제목을 사용하는 것이 두렵기까지 하다.

 

어쨌거나 스물넷에 들어와 이제 이십년을 얼마 남겨놓지 않은 나의 직장 생활을 한번 돌아본다. 나는 이십대때나 사십대인 지금이나 공주과인 적은 없었다. '집에서 새는 바가지 밖에서도 샌다'고 그랬던가. 어릴때부터 나이차이 많이나는 동생들 업어 키우며, 집안일, 농사일 닥치는대로 하던 컨츄리 걸인 내게 공주과가 웬말이겠는가.

 

우선 소소한 예를 들면 앞사람 책상과의 사이에 볼펜이 떨어졌다. 혼자 주워보려고 애써보다가 안되어 책상을 움직여야하는 경우 굳이 공주과가 아니라도 보통 여직원들은 옆에 있는 남자 직원에게 부탁하여 책상을 움직여 볼펜을 줍는다면, 나는 벌떡 일어나서 책상 양쪽을 두팔로 잡고는 잡아당겨서 볼펜을 줍고 다시 책상을 돌려놓는다. 용감한 머슴의 모습. 

 

또한 무거운 서류를 한아름 안고 옮겨야되는 경우에도 나는 도움을 청하지는 않는다. 혹여 나를 돕고 싶어서라기 보다 신사답지 못한 남자로 오해할 주위의 눈을 의식한 남자들의 이기적인 동기의 도움을 가끔 받기는 하지만, 그것도 역시 공주의 자태는 아닐 것.

 

머슴과의 극치를 살짝 공개한다면, 외근업무가 잦던 지난번 부서에서 있었던 일로 내 키보다 높이 있는 표지판의 내용중 일부를 수정하는 일이었다. 차에 사다리나 어떤 올라설 것을 가지고 가야하나 고민하면서 운전을 못하는 나는 옆의 직원한테 부탁하여 도움을 청할까 말까하다가 차마 말 못하고 일단 부딪혀보자고 대책없이 버스를 타고 나섰다. 일단 근처에 도착하여 주변을 둘러보니 재활용 의자를 내 놓은게 있어서 회심의 미소를 머금고 그걸 들고 10여미터 되는 거리를 옮겨와서 일을 해치웠다는 용감한 머슴정신.

 

요즘은 연약한 공주과 보단 용감한 머슴정신을 가진 내가 훨씬 실용적이고 합리적이라는걸 느낀다. 요즘 같이 (영국)신사가 희박한 때에 굳이 도움을 요청하지 않는데, 남자도 아니요 여자도 아닌 대한민국의 아줌마라는 종족을 도와주러 일어서는 남자들은 없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