즐거운책읽기

고통의문제 by C.S. 루이스

안동꿈 2010. 3. 23. 00:11

C.S. 루이스를 '순전한 기독교' 를 통해서 처음 접하고 그 명쾌한 변증적 논리에 매료되어 그의 책을 찾아 읽게되었다. 이 책은 '순전한 기독교'보다 더 많은 지적 에너지를 동원시켜야, 아니 내게 있는 지적 에너지를 총동원해서야 겨우 책장을 넘길 수 있었다는 말이 맞을 것이다.   

 

내가 이 책에 언더라인을 한 구절은 그가 이 책을 통해 독자에게 전하고자 하는 가장 핵심부분이라기 보다 내가 이해할 수 있어서 고개를 끄덕인 부분이 될 것이다.

              

 

그는 이 우주의 어둡고 추운 빈 공간과 생물체들의 고통, 특히 이성을 가진 인간에게는 실제 고통이 닥치기도 전에 예리한 정신적 고통을 미리 느끼게 하여 영원을 간절히 열망하면서도 자신의 죽음을 내다보며 살 수 밖에 없게 만들어버린 이런 우주를 어찌 자비롭고 전능한 영의 작품이라고 볼 수 있는가라고 그의 무신론 때를 돌아보며 이 책의 서론을 시작한다. 그런데 그가 꿈에도 생각 못했던 문제점 하나는 만약 우주가 그토록 나쁜 곳이라면, 사람들은 어떻게 그처럼 나쁜 것을 지혜롭고 선량한 창조자가 만들어 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을까? 그건 우리를 창조한 이가 우리 속에 그 분을 기억하게하는 근원을 만들어 놓으셨다는 것, 그것은 우리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창조자에게서 시작되었다는 것.

 

"하나님이 선하다면 자신이 만든 피조물들에게 완벽한 행복을 주고 싶어 할 것이며, 하나님이 전능하다면 그 소원대로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피조물들은 행복하지 않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선하지 않은 존재이거나 능력이 없는 존재 또는 선하지도 않고 능력도 없는 존재일 것이다" 이것은 고통의 문제를 가장 단순하게 표현한 말이다. 여기에 대답할 수 있으려면 '선하다', '전능하다', '행복하다'는 말에 여러가지 뜻이 있다는 사실부터 밝혀 내야 한다.

 

하나님이 전능하시다는 것은 내제적으로 가능한 일이라면 무엇이든 하실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뜻이지, 내제적으로 불가능한 일도 하실 수 있다는 뜻은 아니다. 가령 '하나님은 한 피조물에게 자유의지를 주시는 동시에 안 주실 수 있다'는 말은 하나님에 관해 어떤 내용도 전달해 주지 못한다.  

 

만일 피조물들이 자유의지를 잘못 사용할 때마다 매번 하나님이 개입해서 바로잡아 주는 세상을 그려보자. 나무 막대기를 무기로 쓰려고 집어드는 순간 풀잎처럼 부드러워지고, 거짓말이나 욕을 담은 음파를 일으키려는 순간 공기가 그것을 거부하는 세상 말이다. 그러나 잘못이라는 것을 저지를 수 없는 그런 세상에서 의지를 자유롭게 행사한다는 것은 그야말로 빈말이 될 것이다. 아니, 이 원리의 논리적인 결말을 따라가 보면 악한 생각을 하는 것 자체가 아예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인간의 고통과 인간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존재를 조화시키는 문제는, 우리가 사랑이라는 말에 하찮은 의미를 부여하며 인간이 만물의 중심인 양 만물을 바라보는 한 결코 해결될 수 없다. 인간은 중심이 아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 인간은 자기 자신을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 하나님이 인간을 만든 주된 목적은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심으로써 우리를 그의 사랑이 '아주 기쁘게' 머물 수 있는 대상으로 만드시려는 데 있다. 

 

하나님의 사랑을 향해 현재의 우리 모습에 만족하라고 요구하는 것은, 하나님께 하나님이기를 그만두시라고 요구하는 것과 같다. 하나님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그의 사랑은 본성상 지금 우리의 인격에 흠들을 저지하고 거부할 수 밖에 없으며, 그는 이미 우리를 사랑하고 계시기 때문에 우리를 사랑스러운 존재로 만들기 위해 노력하지 않으실 수 없다. 전보다 좀 나아졌다해도 여전히 불순한 현재의 우리 모습에 만족해 주시기를 바랄 수는 없다. 

 

고통이 때로 피조물의 거짓된 자족감을 깨뜨려 준다면, 극도의 '시험' 내지 '희생'에서 나오는 고통은 피조물이 진짜 자기 것으로 삼아야 할 자족감 - '하늘이 주신 것이기에 곧 자기 것이라고 할 수 있는 힘'-을 가르쳐 준다. 시험받는 사람이나 희생하는 사람은 자연스러운 동기 유발도 되지 않고 어떤 지원도 받지 못하는 상태에서, 오직 하나님이 그분께 복종하는 의지를 통해 흘려 보내시는 그 힘 하나만을 가지고 행동하게 되기 때문이다. 인간의 의지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것이 될 때 진정으로 창조적인 자기 것이 될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목숨을 얻는다는 말씀에 담긴 여러 의미 가운데 하나이다.  

 

하나님이 인간을 사랑하신다는 것은  우리에게 무관심한 나머지 '사심없이' 우리의 복지에 신경쓰신다는 뜻이 아니라, 두렵고도 놀라우며 참된 의미에서 우리를 사랑의 대상으로 삼으셨다는 뜻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만나고 싶어했다. 그 하나님이 여기 계신다.  우리가 대수롭지 않게 불러낸 위대한 영, 그 "무시무시한 용모의 군주"가 여기 계신다. 꾸벅꾸벅 졸면서 우리가 그 나름대로 행복해지기를 바라는 연로한 할아버지의 인자함이나 양심적인 치안판사의 냉담한 박애주의, 손님 대접에 책임감을 느끼는 집주인의 배려로서가 아니라, 소멸하는 불로서, 세상을 창조해 낸 사랑으로서, 작품을 향한 화가의 사랑처럼 집요하고 개를 향한 인간의 사랑처럼 전제적이며 자식을 향한 아버지의 사랑처럼 신중하고 숭고하며 남녀의 사랑처럼 질투할 뿐 아니라 꺾일 줄 모르는 철두철미한 사랑으로 여기 계신다.

 

내가 감동받은대로 두서없이 적다보니 마치 완전히 끼워 맞춰놓은 퍼즐을 멍청이 같이 마구 흩어 놓은 기분이다. 서둘러 그의 마지막 구절을 옮기고 마무리 하련다.

 

고통은 영웅의 자질을 드러낼 기회를 제공합니다. 그리고 놀라울 만큼 많은 이들이 그 기회를 잡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