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짜증나게 하는 것에 대해서 나는...
짜증은 사람의 마음 중심을 찌르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가장 자리를 살짝살짝 건드리는 것과 같다. 애를 끊는 거대한 슬픔이라는 것과 비교되는 이 짜증이라는 것이 우리의 일상 생활에서 참 분주히 우리를 괴롭힌다는 생각이 든다. 이것이 우리의 불치병인 스트레스의 일종 아닌가. 우리는 거대한 슬픔에 대해서는 체념을 하는 경향이 있는데, 짜증나는 일들에 대해서는 수없이 반복되는 동일한 상황에서도 똑같이 반응한다.
사람마다 짜증나는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기한을 다투는 몇 가지 일들이 한꺼번에 쏟아져 숨 쉴틈없이 바쁠 때 '반갑습니다. 고객님~' 하나도 안 반가운 휴대폰 스팸광고, 신호등 앞에서 내가 타야할 버스가 막 지나가는걸 대책없이 바라보는 것, 급한 일로 화장실에 들어갔는데 휴지가 없을 때, 출근 시간이 촉박한데 입으려고 했던 옷이 찾아지지 않을 때 등등.
짜증나는 상황들을 둘러보면 대부분 시간과 관련된 것이다. 그리고 우리의 계획을 끊임없이 방해하는 태클들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루이스가 그의 저서에서 말했듯이, 우리가 우리의 것이라고 확신하는 시간들과 그 시간들 안에서 빈틈없이 짜 놓은 우리의 계획들이 방해를 받을 때 우리는 낭패감, 분노 그리고 고통을 느낀다. 그러나 우리가 우리의 것이라고 추호도 의심하지 않고 소유권을 주장하는 그 시간을 우리는 단 1초라도 만들어 낼 수 있는가? '아니다' 그러면 그 시간은 우리의 것인가?
나는 예전에 위에 열거한 나를 짜증나게 하는 것들에 굉장히 예민하게 반응했었다. 가령 눈 앞에서 타야할 버스를 놓쳤을 때 확 짜증이 몰려왔고, 앞 단계에서 어떤 일들에서 늑장을 부리지만 않았어도... 그러면서 자신을 괴롭히기 일쑤였다. 스스로 그 고통의 시간들을 늘였다고 볼 수 있다. 아마 그 시기가 삼십대 초반까지가 아니었나 싶다. 육아와 직장생활과 겹쳐진, 인생에서 참으로 바쁜 시기인 것과 지혜와 연륜과 무엇보다도 믿음이 부족한 탓이리라.
그 다음 단계로, 나는 동일한 상황에서 순간적으로 짜증은 내었지만, 지나간 일들을 후회한다거나 하는 일로 고통을 연장하지는 않았다. 그 시기도 지나가고 지금은 짜증을 내지 않는다. 내게 주어진 모든 시간들은 하나님의 손에 의해 디자인되고 있고, 지금 내가 계획해 놓은 것이 진행에 차질이 있다해도 그건 내 계획이 그런 것이고 하나님의 계획은 아니라는 것. 내가 지금 놓쳐버린 저 버스를 결국 놓치는 것이 하나님의 계획일 수도 있다는 것. 그래서 이제 나는 내 계획 속에 나의 생활을 가두어 자유를 잃어버린 자가 되지 않고, 하나님의 더 큰 계획안에서 참 자유를 누리는 자가 될 것이다. 내게 선물로 주어진 시간에 묵묵히 최선을 다하는 것 그리고 그후엔 주어진 모든 상황가운데서 불평하지 않는 것. 그것이 하나님 앞에서 피조물인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라는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