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친구
고향 떠나온지 22년이다.
고등학교 시절을 지난지 20년 남짓된 아줌마의 가슴속에 고등학교적 추억이 아름답게 회상되어지지 않을 대한민국 아줌마가 있을까?
입시공부로 고통스럽고 힘들었어도 지금 돌아보는 고등학교 시절은 처절한 아름다움일 뿐이다.
시골에서 중학교까지 다니고 고등학교는 시내로 나와 자취를 하였다. 성장소설의 주인공처럼 익명을 적응하던 고등학교 1학년은 나를 객관적으로 보게했고, 성장의 고통도 적잖이 있었다.
고2는 나의 인생의 가장 아름다운 시절이었다. 마음을 통한 한 친구로 인하여 붉은 저녁노을도, 아름다운 사랑노래도, 시도, 폭풍우속의 처연한 나무들도 모두 아름답게 보게된 시간들이었다. 그 친구의 이름 석자로 그 모든 아름다운 것들이 지금도 한꺼번에 쏟아져 내리는, 내게 그런 친구가 하나 있었다.
그 친구는 문과반 400여명 중에서 늘 탑을 했고, 나는 그를 좋아하는 이유 하나만으로 탑텐안에 들기도 했다. 우린 이상적인 친구사이였다. 시험기간엔 학교 교실을 찾아가서 공부했고, 시험이 끝나면 학교 언덕에 올라가 노을을 보며 어두워질때까지 노래도 불렀고, 우리반 교실을 찾아가 칠판에 낙서도하며 보냈다. 이웃 고등학교 시화전이 있으면 찾아가 방명록도 썼고, 어두운 밤길을 무작정 걸으며 솟구쳐 오르는 젊은날의 감정을 흘려보냈다.
고3에 우리의 그 열렬하던 1년의 애정같던 우정은 끝이났다. 흔히 얘기하는 대학입시 준비가 그 원인이 아닐 가능성은 100%다. 우리의 멀어짐의 원인 또한 애정이었다. 우린 같은 반이면서도 남처럼 말도없이 지냈다. 우리 안에는 애정도 미움은 더욱 아닌 그 엄청난 양의 추억만이 우리사이를 강물처럼 흘러가고 있을 뿐이었다.
대학에 진학하며 우린 공간적으로도 너무나 멀어져 버렸다. 젊음의 고뇌가 극에 달했던 2학년 어느날 무심함을 가장한 평범한 편지를 친구에게 보냈고, 깊이 고뇌한 흔적이 역력한 답장을 받았다.
그후로도 몇통의 편지를 주고 받았고, 같이 영문학을 전공했지만 친구는 영어선생님을, 난 공무원이 되었다. 먼저 결혼한 나는 첫째를 임신한 채 남편과 같이 그 친구 결혼식에 참석했고 그후로는 만나지 못했다.
그 사려깊은 친구는 지금 어디에 있는지. 이젠 중년의 주부가 되어 아파트 평수를 생각하고 남편의 승진을 생각하고 아이들의 성적을 생각하며 지내고 있을지.
거센 급물살로 달리던 강상류의 시절들이 지나 이젠 유유히 깊게 흐르는 강줄기의 어느뫼서 우리의 삶이 서성이고 있다. 하루만이라도 만나서 강이 저멀리 내려다 보이는 언덕위의 집에 앉아 지나간 궁금했던 얘기 모두 할 수 있다면! 그냥 덮어두었던 우리들의 이야기를 꺼내 볼 수 있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