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 밥이 싫은 아내, 더운 밥을 양보하는 남편
'밥 맛있게 먹었다' , 혹은 '밥맛이 없다' 라는 말을 할 때, 그 의미가 순수하게 밥을 얘기하지는 않는다. 주 메뉴가 되는 요리나 반찬 맛이 한 끼 식사의 만족도를 좌우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유독 그 순수한 밥에 목을 매는 사람들이 있는 것 같다. 그 중에 하나가 나다. 주로 시골 출신이거나, 나이가 좀 지긋하신 분들에게서 주로 나타나는 고질병인 것 같다. 나는 갓 지은 밥은 반찬없이 그냥 먹는 것도 좋아한다. 밥을 푸다가 김이 모락모락 나는 뜨거운 밥을 손으로 살짝 집어서 먹기도 한다. 그 구수한 맛을 나는 정말 즐긴다.
갓 지은 밥에 목을 매는 이유를 곰곰히 생각해 보았다. 어릴 때 반찬이래봐야 김치 한 두가지인데, 늘 변함없는 김치 맛에 비하면 물의 양이 알맞은 따뜻하게 지어진 밥이 그날 밥 맛을 좌우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런데 보리쌀이 많이 섞였거나, 찬 밥이면 영 기분이 좋지 않았다. 우리 어릴 땐 밥 맛의 주체가 말 그대로 밥일 때가 많았다.
어릴적 기억 중에 아직도 안타까워 가족들에게 정기적으로(아마 하지 않은 줄 알고 여러번 했나보다) 하는 얘기가 있다.
어느해 추석이었던가. 엄마가 절기마다 음식을 준비하고, 끼니때마다 반찬에 정성을 들이는 이유였던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오빠도 공부하러 서울가고, 아버지는 명절이 좀 지난 후에 한번 내려오신다는 연락을 받은 해였던 것 같다. 딸들만 있고, 농사일에 한참 일손이 부족했던 엄마는 명절에 아무 준비도 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쌀이 떨어졌는데, 벼를 정미해놓지도 않아서 보리쌀로만 밥을 해 주었다. 나는 너무나 분하고 억울하여 엄마한테 성질을 많이 냈었다. '명절에 맛있는 것도 하나도 안해주고, 보리밥만 해먹는 집이 어디있느냐'고.
남편은 나의 그 사연이 마음에 남아 있었나 보다.
바쁜 아침시간이면 남편이 밥을 퍼줄 때도 있다. 신기하게도 묵은 밥은 늘 한 두그릇 남게 되어 새 밥을 하게 되는데, 그 묵은 밥을 남편은 딸과 자기의 몫으로 푸고 나에게는 새 밥을 먹게 한다. 딸들은 고맙게도 찬 밥과 더운 밥의 밥 맛의 차이를 몰라 갓 한 밥은 너무 뜨겁다고 오히려 묵은 밥을 원한다. 그러나 남편은 그 미묘한 구수함의 차이를 알텐데도 나를 위해 양보한다. 그러면 나는 고맙고도 미안하여 더운 밥을 남편의 밥과 재빠르게 바꾸기도 한다.
그러나 나는 그 더운 밥의 유혹을 항상 이길 수 있을 만큼 강하지 못하다. 그래서 가끔 그 더운 밥의 구수함에 남편의 사랑을 팔아 버릴 때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