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키니 예찬
얼마 전 내 생일을 맞아 딸들이 용돈을 모아 옷을 사주겠다고 하였다.
대부분의 엄마들의 반응처럼 나도 손사래를 치며 됐다고 했었다.
옆에 있던 남편이 핀잔을 주며, 사준다고 할때 받으라고 한다. 나는 마지못해 딸들을 따라, 비록 흔한 브랜드긴 하지만 내 손으로 직접 사 본적은 없는 여성의류 매장에 들어갔다.
점원이 추천해 주는 스키니를 무척이나 부담스러워하며, 또 구입할 마음없이 탈의실에서 옷을 갈아입고 나와 보았다. 나는 너무도 어색한데, 점원은 물론 딸들까지 잘 어울린다고 야단법석이다. 평소 내가 입던 것과는 전혀 다른 스타일의 바지가 무척이나 부담스러웠지만 공짜로 얻은 옷이니 '아님말고' 하는 마음으로 사들고 왔다.
남들처럼 몸에 쫙 붙는 것이 아니라 약간 여유가 있었지만, 어쨌거나 처음 입어보는 스키니 바지는 내가 느끼기에는 참 어색했다. 그런데 거울에 비친 모습은 그다지 부자연스럽지는 않았다. 벌써 내 눈은 거리에 넘쳐나는 스키니에 익숙해졌다는 것이리라. 스키니가 유행한지 어언 6, 7년은 족히 되었으니까.
나는 늘 유행에 민감하지 않았고, 그게 무슨 자존심인 것 처럼 지키며 지냈다. 그렇지만 세상은 나를 그대로 봐주지 않고 변한 시선으로 보게 된 것이다.
그 눈을 나는 의식하지 못했다. 내 편한대로 살면 그만이지 유행이 무슨 상관이냐고 할 사람도 많을 것이다. 내가 꼭 그랬다. 그러나 거기엔 우리 속에 잘 간직된 신선한 의식마저도 매도된다는 것에 우리는 주목할 필요가 있다.
우리의 생각이 아무리 진보적일지라도 스키니(?)를 입지 않고서는 한낫 실천없는 구호만 외치는 이로 비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우리는 그 부분을 감안하지 않을 수 없다.
자신이 물질적인 것 보다 정신적인 부분을 더 소중하게 여긴다고 생각해보자. 그 정신적인 가치가 다른 사람들에게 전달되는 길이 외형적인 부분때문에 차단된다고 하면 그 방해물을 제거하려고 해야 하지 않겠는가.
몸매는 스키니가 어울릴것 같지만 일자바지로 대충 남들의 눈을 무시하는 사람보다 몸매는 다소 우람하지만 스키니를 나름대로 성실히 챙겨입은 사람에 대한 사람들의 경외심은 다르다. 아니, 달라야 한다.
이 아름다운 봄에, 마흔의 아줌마가 외치는 '스키니 예찬' ... 생뚱 맞을라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