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이 밥 먹여준 사연
퇴근시간을 얼마남겨두지 않은 시간에 예전에 과장님으로 모셨던 현재 국장님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 저녁 같이 먹을 시간되나? 내가 너거 고향선배 소개해 줄께."
" 어떤 사람인데요?"
" 어. 안동농고 나온 사람인데, 안동 사람만나고 싶단다. 너거 고등학교 선배 최계장하고 같이 보자."
'저는 일주일 새끼줄이 꽉 짜여있기 때문에 갑작스런 이런 약속은 몹시 곤란합니다'
뭐 이런 말 하는 여자들도 있드만, 나는 매일매일 저녁밥을 제시간에 챙겨 주기만을 눈빠지게 기다리고 있는 새끼 둘과 남편 때문에 여섯시 "땡"하면 출발하려고 기다리는 사람이므로, 마음이야 같지만 그 진실은 전혀 다른채 퇴근 직전 이런 전화가 몹시 부담스럽기는 마찬가지다.
국장님이 예전에 우리부서 과장님일때 부산에서는 흔하지 않은 저 경북 북부지방 안동에서 온, 자신이 학창시절에는 지방 명문으로 이름이 알려졌던 고등학교를 졸업한 직원이, 오랜 친분이 있는 여자 계장님과 같은 동문이라는 사실을 알리고 연결시켜주는 수고를 아끼지 않음으로써 먼 타향땅에서 고향 동문 선배를 만날 수 있게 되었다.
그 후에도 국장님은 자리를 같이하는 기회만 있으면 다른 사람들에게 농담반 진담반으로(나는 명문이 아닐 때 다녔으므로 내겐 확실히 농담으로 들렸다) '대 안동여고' 출신이라고 나를 소개한다. 나참. 명문이란 말이 의미가 없어진지 몇년이나 지난, 우리들이 고등학교 다닐때는 대 선배님이 우리 선생님이신 분이 몇분 계신 관계로 늘 '우리가 학교다닐때는...'이란 소리를 수시로 듣는 괴로움을 더한것 외에 명문고의 흔적을 보여주는 근거는 별로 없어 보였다.
고향 선배 계장님은 그 명문이던 시절에 다녔던 분이므로 안동농고 선배님을 만나러 가는 차안에서
" 야. 우리가 고등학교 다닐때는 안동농고 아(~)들은 우리 쳐다보도 못했지"
하며 열을 내서 얘기하셨다.
그러나 그 안동농고 선배라는 분은 우리와는 비교가 안될 정도로 성공한 사람이었다. 처음보는 우리들에게 고향이 같다는 이유로 한끼 식사비로 내가 이제껏 지불해 본적이 없는 최고급 요리를 '동래별장'이라는 곳에서 대접한다. 만나보니 일흔을 바라보는 나이로 고향 떠나온지 긴 세월이 지났을텐데도 안동말투, 사투리 그대로다.
어린시절 부모를 일찍 여의고 고생하며 자수성가한 사람으로 건설건축업을 크게하였고(지금은 물러났지만) 안동과 부산의 대형 공사 . 건축물등을 지은 사연들도 얘기를 한다. 삼남매를 훌륭히 키워냈는데, 아들딸이 우리나라 최고의 대학에서 법과 의학을 전공하여 스위스와 미국에서까지 활동하고 있으며, 특히 딸은 존스홉킨스에서 스카웃해 갈정도. 막내딸은 집앞에 강보에 싸여 대문앞에 버려진걸 키워 냈고 그 딸 자랑도 만만찮다.
자신이 어릴적 가난하였던게 한이 되어, 학비가 없어 학업을 잇지 못하는 청소년들 70여명에게 학비를 대주고 돌보아서 그들도 모두 자기 자식이라며 그들의 성공한 사연들도 침이 마르도록 소개한다.
자신이 지금까지도 철칙으로 지키는 습관은 무슨일이 있어도 저녁 여섯시면 집에 돌아가서 가족과 같이 저녁을 먹는것이며, 급한 일이나 약속이 있으면 가족과 저녁을 먹은 후 다시 나온다고 한다.
지금은 부산 인근에 수만평의 땅에 농사짓는 일을 유일한 낙으로 삼고 살고 있단다. 그간 사업을 하여 모은 재산이 엄청나지만 자식들로부터는 재산상속 포기를 받아놓았고, 그 재산으로는 아내와 자신의 이름으로 장학재단을 만들 계획이란다.
그날 존경과 부러움을 한 몸에 받은 노 고향선배는 그 옛날의 명문 안동여고 두 여인내를 안동농고가 완전히 박살을 내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