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제주
직장에서 2박3일의 여행 기회가 주어졌다. 열명 남짓한 인원으로, 여행지는 울릉도였다. 겨울 울릉도 여행이라 날씨가 초미의 관심사였다. 결국 풍랑주의보로 인하여 하루 전날 제주도로 급하게 변경되었고 비행기 티켓만 겨우 마련한 후 숙소와 일정은 추후 정하기로 하였다. 우리의 여행은 그렇게 허술하게 진행되었다.
그러나 갓 들어온 이십대 새내기부터 이십년 경력의 오십대 초반까지 함께 모여보니 평균 서너번은 제주도를 다녀온 분들이었다. 서로의 제주도에 대한 지식들은 거센 파도(?)가 우리의 여행을 방해하여도 끄떡 없을 정도로 막강하였다. 공항 근처에서 세 대의 차를 렌트하여 운전자와 보조 운전자를 정하고, 가족인맥까지 동원하여 공기업 관사를 숙소로 빌려 엄청난 숙박비 절약과 이십대의 스마트한 정보로 수시로 단체 카톡을 통해 여행 장소에 대한 의견 수렴을 거쳐 할인혜택을 꼼꼼히 챙겨 관광을 진행하였다. 물론 여행에서 빼놓을 수 없는 식사 문제도 카톡을 통해 다른 조의 의견 수렴을 거쳐 골고루 다양한 음식 기행을 놓치지 않았다.
그 와중에도 알뜰한 주부의 근성은 힘을 발휘하여, 첫날 차를 빌리자마자 곧장 달려간 곳은, 공항에서도 가깝고 제주도에서 유명한 동문시장, 알뜰한 가격으로 흥정을 거쳐 과일과 초콜렛을 주문하여 각자 근무하는 부서로 택배 보내고(요런 부담은 일찌감치 더는게 상책), 다음날 점심때쯤 사무실 직원들로부터 '맛있다. 고맙다'는 전화를 받는 기쁨도 누렸다.
늘 느끼는 거지만 제주도의 얼굴은 참 다양하였다. 산굼부리에서 완연한 겨울을 맛보았고 성산일출봉을 지날즈음에 만난 유채꽃밭은 놀라움과 반가움을 안겨주었다. 숙소 근처 함덕서우봉해변의 일출을 보기위해 찾아간 산책로, 그 이틀간의 새벽공기는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상쾌함이다. 저녁 마감시간이 다 되어 찾은 김녕미로공원은 내겐 특별한 기억이다. 미로를 빠져 나오는데 20분에서 30분 정도 걸릴 것이라는 안내 직원의 말이 있었는데, 나는 5분 만에 찾아 종을 쳤고, 너무나 쉽게 찾아버려서 수벽을 헤매는 직원들에게 뭐라 도움을 줄 수 없었던 안타까운 어둠 속의 시간들도 있었다. 드라이브중 나타났다 사라졌다 하는 한라산의 그 고고한 자태는 우리에게 한없는 위로가 되었고, 한라산 꼭대기의 설경은 말로 다 할 수 없는 벅찬 감동을 주기도 했다.
이번 여행은 제주도 하면 떠오르는 이름 난 곳 보다 곳곳에 숨겨진 잔잔한 즐거움을 찾아 다녔다고 할 수 있다. 운전을 맡은 새내기들은 늘 우리를 감동시켰다. 그 낯선 지역에서도 네비를 무시하고 멋진 해안도로를 찾아 드라이브를 즐길 수 있게 해주었고, 한적한 곳에 마련된 드라마나 영화 촬영지를 들렀다 가느라 다른 팀과 함께 모이는 시간이 좀 지체되어 슬쩍 둘러대기도 했다.
제주도 또 언제오랴 싶어 모두들 하나라도 더 보고 가려다가 둘째 날은 저녁시간이 훌쩍 지나버렸다. 카톡을 통해 의견을 묻고 동의를 얻어 숙소 근처 동문시장에 다시 들러 김밥, 떡볶이, 튀김, 팥죽, 순대 등을 푸짐하게 사서 숙소에 가서 라면까지 끓여 저녁을 해결하는 특별한 추억도 남겼다.
마지막 날은 크리스마스 이브라 교회 행사도 있어서 오전 일정만 함께하고 나는 4시간 일찍 부산으로 출발하였다. 여전히 단체 카톡을 통해 들려오는 일정과 날아다니는 사진들... 아쉬운 마음도 있었지만 2박3일의 제주도 여행을 조용히 돌아볼 수 있는 시간이어서 또한 좋았다.
크리스마스 이브까지 끼어 여행을 떠나는 철없는 아내가 못마땅할 법도 한데 고가의 노란색 점퍼를 사다놓은 남편, 여느때처럼 '얼마냐, 외투 많은데 뭐하러 샀냐'는 나의 구박에 '고맙다며 좋아하면 안되냐'는 남편.
속 마음은 불편하지만 즐거운 표정을 지어보이며 그렇게 떠난 제주도 여행이었다. 비행기 출발전 남는 시간에 면세점에 들렀다. 남편에게줄 크리스마스 선물로 넥타이를 골랐다. 내 평생에 고른 가장 비싼 넥타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