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검진을 받고
우리가 우리의 의지와 상관없이 끌려가게 될때 우리는 두려움을 느낀다. 상대방이 정해 놓은 틀을 따라 움직이되, 어떤 고통이 기다릴 지 전혀 예측할 수 없고, 우리의 자유의지가 전혀 개입할 수 없는 일련의 과정 속으로 들어 간다는 건 우리를 한없이 위축되게 만든다.
검진의 과정들 사이에 놓인 긴 기다림 속에서 무표정하게 이름이 불리기를 기다리는, 검진센터 직원에게는 귀찮은 일거리일 뿐인 사람들을 물끄러미 보면서 나는 생각한다. 저들도 누군가에게는 그 옆 모습이 우연히 스치는 것만으로 가슴이 뛰고, 그 이름 석 자에도 마음이 환해지는 사람들도 있으리라는...
5시간 가까운 검진을 마치고, 반토막난 하루를 남편에게 책임지라고 맡겼더니 영화의전당 '식당 120'에서 점심을 거나하게(?) 사주고 바람을 쐬어 주겠단다. 반나절로는 그럴듯한 단풍구경은 어렵고 가까운 울산의 '반구대 암각화'을 찾았다. 해설사의 설명도 듣고, 망원경으로 바위에 새겨진 문양들을 세어보기도 했다. 해지기 전에 나와서 언양에 소고기라도 한근 끊어다가 애들 먹이자고 서둘러 나오는 길에 왁자지껄 아줌마 부대가 출동하여 우리 길을 가로막는다. 웬걸 그 행렬 끝에는 예전에 함께 근무했던 직원이 있었다. 서로의 근황을 잠시 물으며 그는 근무 중이고, 나는 쉬는 중임을 확인하며 손을 흔들었다.
가을 들판은 풍요로왔다. 타작을 기다리는 노란 벼들과 이미 살이 오른 배추들, 감나무에 빽빽히 달린 짙은 주황의 감들... 언덕에 무리지어 있는 억새는 또 얼마나 정취가 있는지. 그 정취에 못이겨 부끄럽게 핀 들국화 몇 가지와 억새 몇 가지를 잘라 가방에 끼웠다. 어릴 적 들로 산으로 쏘다니며 맡은 들국화 향이 그대로여서 얼마나 다행인지, 어깨 위에서 하늘거리는 억새가 얼마나 기분이 좋은지...
남편 팔짱을 끼고 마냥 흥얼거리며 돌아오는 발걸음에 충분히 감사가 표현되었으리라 여기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