밝고 투명한 사람, 어둡고 우울한 사람
밝고 투명한 사람이 있다.
우리가 어떤 개념을 명확하게 알게 되는 것은 그 반대의 개념과 비교해 볼 수 있을때 명확하게 알게 되는 것 같다. 사람의 성품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아주 성격이 밝고 분명하며 모든 사람들에게 친절한 후배를 보았다. 얼마간은 그녀의 그런 성품이 눈에 띄지 않았다. 그런데 최근에 그녀와 대조될 만한 동료를 통해 그녀의 밝고 투명한 성품이 마음에 와 닿게 되었다.
후자는 최근 직장 내에서 다소 억울한 대우를 받게 되었다. 나는 그녀의 억울함을 들어주게 되었고, 그 후에도 시시때때로 자신이 힘든 상황에 놓일 때마다 나에게 하소연을 했다. 또한 주위 사람들에게 과민하게 반응하며 나의 공감을 바랐다. 그러나 그 공감이 단순히 공감과 위로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는걸 나는 곧 깨닫게 되었다. 그녀가 험담한 동료를 대하는 나의 태도가 어색해지고, 하루종일 머무는 사무실 공간이 무척 어두워졌음을 느낄 수 있었다. 나는 그녀를 위로해주는 것도 필요하겠지만, 나에게는 그녀보다 내가 더 소중하다는 것을 문득 깨닫게 되었다.
그 후 그녀의 얘기를 들을 때마다 '상대방의 의도는 그런 것이 아닐 것이다. 네가 스스로 그렇게 생각함으로써 너를 더 힘들게 하는게 아니냐.', '다른 사람에게 어떤 사람의 험담을 하며 공감을 얻으려고 하면 그 순간은 기분이 좋을지 모르지만 결국 모두를 불편하게 하고 서로에게 올무가 된다.' 라고 하며 나의 생각을 조심스럽게 얘기했다. 그러면서도 여전히 그녀를 대할 때마다 환하게 웃어주며 격려해주려고 노력하였다.
어릴 때는 티없이 밝고 명랑한 사람들은 생각이 없어 보였고, 어둡고 우울해보이는 사람들은 세상사를 깊이 고뇌하는 것 같아 고상해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나이들고 세상 경험이 쌓이니, 세상은 누구에게나 고통과 아픔이기 마련인데 밝게 생활하며 주위 사람들에게 밝은 기운을 전해주는 사람은 자신의 어두움을 끌어안고 인내하며 절제하는 성숙한 사람이고, 우울과 고통을 얼굴에 나타내며 주위에 어두운 기운을 전해주는 사람은 나이가 들어도 아직 철이 덜 든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늘 주위 사람들은 나보다 강하여 나를 힘들게 한다고 여기는 사람과 주위 사람들은 나와 동등하며 서로 즐거움을 나눌 수도 있고 어려운 일을 풀어가는 방법을 서로에게서 얻기도 한다고 여기는 사람. 그런 두 사람의 하루의 삶의 질이 같을 수가 없다.
위로와 공감, 소통를 많이 이야기하는 세대다.
그러나 개인주의가 팽배한 사회이기 때문에 위 덕목들을 강조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우리는 위로와 공감, 소통에 대해 이야기하기 전에 먼저, 홀로서기를 올바로 배워야 한다고 생각한다. 홀로서기가 바로 되면 위 덕목들은 저절로 되어지는 것이다. 편견이 가득한 절룩발이의 성품으로는 공감과 위로, 소통들이 인스턴트일 뿐아니라, 상대방을 끌어내려 함께 멸망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