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온 뒤에
며칠 비가 많이 내렸다. 출근길에 불어난 물이 시원하다. 흙탕물과 맑은물 사이의 약간 푸르스름한 물빛깔이 어릴적 고향 생각을 떠올리게 했다.
여름이면 한 두 차례 무지막지한 비가 쏟아졌다. 비가 오면 아무것도 못하고 방과 마루를 오가며 비가 그치기만 기다렸다. 비내리는 며칠동안 적막한 시간을 보낸 후 해가 쨍하고 뜨면 밖으로 달려나간다. 우리가 다니던 골목엔 새로운 개울이 생겼고, 빨래터가 있던 시냇물은 강이 되었다. 늘 내 집처럼 드나들던 곳이니 반가운 마음에 겁없이 달려들기도 한다. 그랬다간 예상치못한 물살에 넘어지기도 하고 휩쓸려가기 일쑤다. 그와중에 물살이 뺏어간 신발 한 짝에 가슴 아픈 적이 많았다. 차마 버리지 못한 남은 한 짝이 집집마다 툇마루 아래 뒹굴곤 했다.
비가 온 직후엔 산골짜기에서 내려온 흙탕물로 한 사흘 정도는 빨래도 못한다. 흙탕물뿐 아니라, 불어난 물로 빨래터도 사라져버렸기 때문이다. 황토색 시냇물이 푸르스름해질때면 물도 줄어 빨래터가 모습을 드러낸다. 가물어 청태가 낀 시내가 비에 쓸려가고 깨끗한 빨래터를 돌려주면 너도나도 빨래터로 간다. 따가운 햇볕아래 오랜만에 빨래하는 날은 더없이 기분이 좋았다.
지금 돌아보면 어릴적 우리들의 생활은 어느것하나 소비적이지 않았다. 흐르는 시냇물에 목욕하고 빨래하고, 들에서 자연이 내어준 열매와 푸성귀들이 양식이었고, 먹고난 찌꺼기는 소나 닭이 먹고 다시 흙에 거름으로 돌아갔다. 우리가 생활한 흔적들은 거의 없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살며 지나간 자리들은 변함없이 그모습 그대로였다. 사시사철 변하는 계절들이 나날이 우리를 키워 어른이 되게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