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살림살이 소사(小史)
오늘도 풍족하지 않던 어린시절 넋두리를 풀어 놓으려고 한다.
나는 초등학교 3학년 즈음부터 살림에 손을 대기(?) 시작한 것 같다. 학교에서 돌아오면 밭에서 일하는 엄마와 일꾼들을 위해 참을 챙겨 가야했다. 지금 기억하기로는 주로 감자를, 한쪽이 날카로운 동 숟가락으로 긁어서 간을 맞추어 화덕에 얹고 불을 지펴서 삶은 감자를 밭에 날랐던 것 같다. 그리고 반찬은 엄마가 주로 하셨지만 밥은 전적으로 내 몫이었다. 5학년땐가 전기 밥솥을 사게 되어 그간 힘들게 하던 밥짓기가 간편해져서 정말 기뻤던 기억이 난다.
중학교를 졸업한 후 시내에 있는 고등학교에 진학하면서 자취를 하게 되었고, 나의 살림살이는 계속 이어졌다. 친구들은 엄마가 반찬을 해서 갖다주든가, 주말에 집에서 반찬 보따리들을 날랐지만, 우리집은 많은 농사일로 엄마가 늘 바빴기 때문에 집에서 반찬을 가져온 기억이 없다. 고등학교 자취생활중 내 기억속엔 공부하기 위해 사랑하는 가족들과 헤어져 외롭게 자취생활을 하고 있는데, 맛난 것 사먹고, 맛난 것 챙겨 먹는 일은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고, 일부러 금욕적인 생활을 했던 것 같다.
고등학교 3학년 진학하기 직전 봄 방학때 갑작스럽게 엄마가 돌아가셨다. 보고싶어도 3년만 참으면 실컷 볼 수 있다며 참고 아끼던 엄마를 잃어버린 슬픔이 1년내내 그리고 1년이 지나도 하나도 줄어들지 않고 같은 부피로 내곁에 있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온 가족이 부산으로 이사를 와서 함께 살때 큰 딸인 나는 아버지와 오빠 여동생 둘의 어엿한 주부였다. 아침엔 아침식사와 아버지 점심과 초딩중딩 동생들 도시락을 준비해야 했고, 대학생이었지만 고딩처럼 해다니면서 동아리도 들지 않았고, 미팅은 한번도 안해봤다. 저녁이면 해가 지기전에 어김없이 돌아와 아버지한테 시장갈 돈을 받아 시장봐서 저녁 준비를 했고, 토요일엔 김치도 담고 간혹 고추장도 담았다.
오빠는 내가 스물다섯에 결혼을 하였고 나는 올캐언니에게 살림을 넘길 요량으로 마음이 부풀어 있었는데, 쌍둥이를 임신한 언니는 입덧이 심했고, 식구들 식사는 여전히 내 몫이었다. 1년뒤 나는 결혼을 하였고, 이젠 기회만 있으면 넘길, 남의 것 잠시 맡고 있는 개념의 살림살이가 아닌 제 주인 찾아간 살림살이를 살고 있다.
그런데 살림살이를 정식으로 배운적도 없고 30년이라는 긴 살림경력에 누구에게 배우고 말고 할 것도 아닌 나는 '식사 준비 빨리하기' 뭐 이런 경연대회라도 있으면 아마 기록갱신이라도 할 것 같은데, 글쎄 맛에 있어서는 높이 평가 받아 본 적이 별로 없는 것 같다.
그래도 결혼후의 살림살이가 즐거운건 남편이 많이 도와주기 때문이다. 나보다 한시간여 늦은 출근인 남편은 아침마다 청소기 쫙 돌리고, 빨래감들을 세탁기에 돌려놓고 씻고 나간다. 엄마가 없는 날보다 아빠가 없는 날을 우리 아이들은 더 많이 느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