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심시간 2분전 요란한 전화벨소리와 함께 동사무소 직원의 다급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가족이 제출한 사망신고서를 열람할 수 있습니까?"
"글세요. 무슨 일로 그러십니가?"
수화기 너머로 여자의 앙칼진 목소리가 함께 실려왔다.
"이 소리 들리시죠. 일단 전화를 바꿔 드릴께요."
나의 의견을 들려줄 틈도 없이 그 공포스런 목소리의 주인공을 대면하게 되었다.
얘기인 즉
몇 달전에 자신의 어머니의 사망신고를 할 때는 사망자의 주민등록증을 가져오지 않으면 신고가 안된다고 해서 사흘동안 집안을 뒤져서 주민등록증을 찾아서 신고를 했는데, 이번에 아버지 사망신고는 오빠가 했고, 아버지 주민등록증을 자신이 가지고 있는데 어떻게 사망신고를 할 수 있었느냐며, 오빠가 신고한 사망신고서를 보여달라는 것이다. 사망신고를 받은 동사무소에서는 이 일을 간단하게 볼 상황이 아닌것 같아서 구청에 정확한 지침이 있는지를 물어온 것이었다.
이런 일이 문제가 된 사례가 없었고, 우리과에서 전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 사항도 아닌것 같아서 어떻게 답을 해야할지 몰라 무척 당황했다. 가족이니 신고서를 보여주는 일은 큰 문제가 아닐것 같지만 재산상속과 관련하여 분쟁상태에 있으니 명확한 지침없이 대처했다간 매우 곤란해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당장 어디서 규정을 찾아봐야 할지도 알 수가 없었고 대놓고 고함부터 질러대니 굉장히 당황스러웠다.
"죄송합니다. 제가 그것까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2시쯤 계장님이 오시면 다시 확인해서 연락드리면
안될까요"
"구청에 있으면서 왜 그것도 몰라요? 이름이 뭡니까?"
갑자기 날아든 날카로운 비수처럼 내 가슴을 찌르는 한마디에 나는 순간 멈칫했고, 대답할 말을 놓치고 말았다.
"이름이 뭡니까? 이름이. 당신 이름이 뭐냐고?"
내 입에서 아무말도 나와 지지가 않았다.
"이름. 이름. 이름. 당신 이름을 얘기하란 말야."
나는 궁지에 몰린 쥐처럼, 어떤 비수보다도 날카롭고, 무자비한 언어의 공격앞에 속수무책으로 내 입, 몸, 마음까지 모두 얼어붙고 말았고, 전화기는 매섭게 끊어졌다.
그 다음 순간 내 몸의 모든 부분들이 떨려왔다. 도대체 무슨 일을 저지른 것인가. 왜 이름을 얘기하지 않았을까.
마음이 채 진정되기도 전에 호적계 앞을 어정거리며 시계를 쳐다보던 한 여자민원이 계장님을 찾아갔다. 계장님은 나를 불러 그 여자분과 대면시켰고, 나를 보자마자 그녀는 모든 에너지를 입에 모은 듯한 무지막지한 폭언을 내 뱉었다.
"이 여직원은 여기서 근무할 자격이 없습니다. 당장 내보내세요. 왜 그런것도 몰라요. 그리고 이름은 왜 얘기
하지 않죠. 내가 이름을 대라고 얼마나 소리질렀는데. 그리고 계장님이 2시에 있으니까 2시에 오라고 해서
나는 2시에서 1초도 안 놓치고 정각에 맞춰서 왔습니다. "
"죄송합니다. 제가 이름을 미쳐 얘기하지 못한 것 정말(죄송하게 생각합니다)"
그녀는 나의 사과도 나의 말도 들으려고 하지 않고 마치 나의 인격을 짓밟는 것만이 유일한 목적인양 그녀의 폭언은 억지소리를 섞어서 거의 1시간 남짓 계속되었다. 1층 민원실 그 넓은 홀이 쩌렁쩌렁 울렸고 다른과 직원들도 모두 일어서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확인하기 위해 쳐다보고 있었다. 그녀는 모든 괴로움과 분노를 다 쏟아내려는 기세였고, 그 모든 분노는 고스란히 내가 흡수해야만 했다.
그 상황에서 그녀는 크고 나는 작았다. 그녀가 나에게 하는 행위는 나를 감정도 없고 자존심도 없는 고층 콘크리트로된 청사였고 거기다 대고 소리치는 것인지도 몰랐다. 이 사회에 대한 모든 분노를 쏟아내고 있는 중이었
다.
계장님은 신고서를 열람할 수 있는 범위와 사망자의 주민등록증을 회수하는 문제 등을 관련 부서등에 문의 후 안내했고, 간간이 오빠네 식구와 재산 관계 등이 얽혀서 분쟁이 있다는 등의 얘기도 들렸다. 돌아가면서까지 분이 안풀렸는지 내 자리 앞에 서서 '당신은 공무원 할 자격이 없으니 당장 이 자리를 떠나.'하면서 돌아갔다.
나도 감정이 있는 사람인 이상 너무나 억울하고 분하고 그녀가 너무나 미웠다. 그후 며칠동안 그녀의 올무에서 헤어나올 수가 없었다. 악몽을 꾸고, 거리에서도 옆을 휙휙 지나가는 사람들을 그녀로 착각하곤 했다. 마음이 쇠약할대로 쇠약해졌다.
그렇게 며칠을 지내던중 어느날 갑자기 그녀가 가엾다는 생각이 스쳐갔다. 사십이 넘은 나이에 결혼도 하지 않은 채 부모님도 다 돌아가셨고, 가족들간에 따뜻한 정을 나눌 수도 없으니 얼마나 외롭고 힘이들까... 그녀를 용서하자. 그러자 그녀의 악몽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약 2주가 지났을까. 그녀가 호적등본을 발급 받으러 왔다. 나의 가슴은 가늘게 뛰었지만, 이제는 웃으면서 대할 수 있었다. 그녀도 웃음을 보였다. 그녀는 여러 가지 서류를 발급 받기 위해 분주해 보였고, 다른 서류의 발급장소를 묻기에 정성껏 안내해 주었다.
그랬다. 그녀에게 나는 콘크리트로된 관광서 건물일지도 모른다. 내게 감정은 있을 수 없다. 어쩌면 우리는 아이들이 놀다가 줄이 끊어진 그네일지도 모른다. 줄이 끊어짐으로 인하여 그들의 마음을 상하게 하였을지언정 그네가 고통을 느낄 수는 없지 않은가. 얼른 고쳐서 그들에게 만족을 줄 수 있는 그네로 신속하게 돌아와야 하는 것만이 우리의 본분일 뿐.
그 후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그녀에 대한 기억이 사라질 때쯤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그녀였다. 여러번 돌아서 내게 걸려온 전화 같았다. 그녀는 '이런 것에 대해서 물어볼 데가 없어서 연락을 했다'고 하면서 재산상속과 관련된 어떤 것을 물었다. 나는 내가 아는 한 설명을 해주고 더 자세한 안내를 받을 수 있도록 연락처를 알려 주었다.
이제야 그녀와 완전한 화해가 이루어졌다고 생각해본다.
'지난 글' 카테고리의 다른 글
30년전 시골 중학생의 글<어미 염소의 모정> (0) | 2010.12.18 |
---|---|
부치지 못한 편지 (0) | 2009.11.22 |
"친절" 이란 명찰을 달고 간 중국 (0) | 2009.08.02 |
천원 지폐 두 장 (0) | 2009.08.01 |
월요일은 항상 빨리 지나간다.- 남편의 개인 홈페이지에서 - (0) | 2009.07.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