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 강가에서

매일의 치열한 일상 속에서도 저녁 강가처럼 하루를 돌아볼 수 있다면...

저녁강가 단상

교장선생님이 급히 찾은 이유

안동꿈 2010. 10. 21. 23:25

벌써 이십년도 훨씬 이전인 중학교 3학년 때의 일이다. 내가 살던 동네는 일가 친척이 함께 모여 살았고, 혹 다른 성을 가진 집이 몇 집 섞여 살고있는 그런 풍경이었다. 그러니 내 또래 여자애들 이름은 거의 비슷하여 그 당시 우리반에 '류○숙'이라는 이름이 꽤 많았던 걸로 기억한다. 여자 이름에는 '숙'자를 붙이라는 법이라도 있는듯 너나 할 것없이 여자애에게는 '숙'자를 달아주었다. 그러던 어느 날 겨울방학이 끝나고 첫 등교일이었다. 담임선생님을 통하여 교장선생님이 찾으니 교장실로 얼른 가보라는 전달을 받았다. 

 

멀찍이 지나가셔도 조심조심 행동이나 말소리도 한번 더 살피게되는 교장선생님이 아닌가. 나는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얼른 달려갔다. 교장선생님은 내게

" 겨울방학때 나에게 편지를 쓴 학생이 자넨가? "

" 전 아닌데요. 교장선생님. " 

" 그럼 누구지? △숙이도 아니라고 하고..."

 그때 학생 부회장을 하고있던 △숙이도 벌써 다녀간 모양이다. 교장선생님의 말씀인 즉슨 겨울방학에 안부편지를 보낸 학생이 있는데, 이름은 밝히지 않았고, 대충 내용을 보니 성은 '류'이고 이름 끝자가 '숙'이라는 것이다. 교장선생님은 학생이 교장선생님께 안부편지를 보내는 일이 잘 없는데, 기특하게도 편지를 보낸 학생이 누구인지 얼굴을 보고 싶으셨던 모양이었다. 괜히 나는 방학중에 교장선생님께 안부편지 챙겨서 보낼줄 아는 사려깊은 학생이 못되었다는 자책을 뒤통수에 메달고 돌아서 나올 수 밖에 었었다. 

 

그후 한 두명이 더 교장실에 놀란 눈으로 달려간 후에 교장선생님께 당돌한 안부편지를 보낸 친구가 밝혀졌고, 그다지 지명도는 없었지만 그런 엉뚱한 짓 한 게 그 답다는 식의 평가를 받기도 했다. 요즘 방학중에 담임선생님께도 편지쓰는 풍경을 보기가 너무나 어려운 시절이다. 폰이나 메일이 있으니 굳이 편지를 쓸 필요가 없어서이기도 하지만, 문자나 메일은 너무 가볍게 여겨져 '송구함'이 그 이유라고 생각해두자.

 

우리는 가끔 '설마 나를 기억할까', '나 같은게 감히' 혹은 '누가 튀기 좋아한다고 욕하면 어쩌지' 하면서 용기있는 생각앞에서 자신을 움츠려 버릴 때가 많다. 용기있는 도전과 새로운 아이디어 앞에는 언제든지, 저런 방해물이 있기 마련이다. 늘상 하는 생각과 늘상 진행되는 평범한 일에는 방해거리도 없을 뿐더러, 전혀 이슈가 될 수 없는건 당연한 일일 것이다. 나는 그의 용기있는 행동에 한 표 던질 마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