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마음이 잠시 일상의 빼곡한 틀을 벗어나지 싶은날이면 가끔 뽑아서 읽게되는 내 청춘의 일기장이 있다. 바로 대학 1학년이 시작될 무렵부터 쓴 것으로, 거기에는 언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보다는 내 마음의 변화만이 일기의 유일한 소재였던 것 같다. 가끔은 책을 읽고서 감동받은 구절들을 옮겨 적은 것도 자주 보이긴 하다.
조금은 특이하게 보이는 이 일기장은 여섯살 많은 오빠가 새로운 결심을 하고서 두어장 정도 기록하였던 것 같은데, 아마 얼마 못가서 그 부분이 찢어진 후 이리저리 굴러다니던 것이 내 손에 들어온 것으로 기억된다.
아이보리빛 백지의 이 일기장은 파란 잉크의 만년필로 늘 채우곤 했다. 아이보리빛 백지와 파란 만년필. 이 두가지 조건만 만족되면 내 영혼은 자유를 얻었다. 내 복잡하던 마음이 만년필을 통해 백지위에 정갈하게 정리되고 난 후의 환희는 마치 마약과도 같아서 나는 늘 이 일기장에 집착하곤 했다.
그때는 왜 그렇게도 날마다 절망이고 날마다 고통이었는지 모르겠다. 분명 절망과 아픔에는 이유가 있었겠지만, 일기장에 조차도 구체적으로 쓰기를 꺼려했던 청춘의 자존심 같은게 엿보인다.
이제 어른이 되어서야 그 아픔이 청춘의 특권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이젠 절망이나 아픔이 나를 휘두르도록 방치할 수 없는 수많은 이유들이 나를 겹겹이 에워싸고 있기 때문이다. 그 청춘의 고통의 혈흔속엔 자유가 베어있음을 본다. 그 때문에 청춘은 그토록 아름다운 것이다. 20여년이나 지난 그때의 일기를 들춰보며 마치 남의 일기를 훔쳐보는 것과도 같은 은밀한 즐거움을 느낀다.
'지난 글' 카테고리의 다른 글
30년전 시골 중학생의 글<어미 염소의 모정> (0) | 2010.12.18 |
---|---|
부치지 못한 편지 (0) | 2009.11.22 |
그녀와의 재회 그리고 화해 (0) | 2009.08.19 |
"친절" 이란 명찰을 달고 간 중국 (0) | 2009.08.02 |
천원 지폐 두 장 (0) | 2009.08.0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