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마다 단장하는 준산과 그 아래 명랑하게 흐르는 시내 옆의 노란집, 이제 곧 돌아가게 될 본향과도 같은 그곳에서 일흔의 작가가 잔잔히 돌아보는 지나간 삶의 이야기들이 있다.
'그들만의 사랑법'에서는 노부부의 아름다운 해로의 모습이 우리의 가슴을 뭉클하게 한다. 지금의 우리 부모님의 모습이기도 하고, 얼마 후 만나고 싶은 우리의 모습이기도 하다.
할아버지의 삭정이 같은 등을 긁어주면서 할머니 가슴에 피어나는 젊은 날 청년의 그 구애의 눈빛을 기억하는 일은 참 아름답다.
일흔의 나이에 떠올리는 어릴 적 할아버지의 사랑, 어머니의 남다른 교육열, 동숭동 캠퍼스의 추억 그리고 지금의 젊은이들에 대한 아쉬움들을 그는 무척 따뜻한 시선으로 돌아보고 있다.
봄은 여자, 가을은 남자의 계절이라고 했던가. 감성 풍부한 작가의 마음에 담겨있는 봄의 애틋함이 십대의 감성조차도 따라가기 어려우리라. 여기저기서 봄꽃소식이 전해지는 지금, 그의 글을 읽고 있노라면 우리의 가슴에는 더 화사한 꽃이 피어나는 것 같다.
박완서님의 노란집을 다 읽고 난 내겐 한편의 그림이 남아 있다.
이제 돌아갈 본향을 눈 앞에 둔 곳에 지어진 노란집에서 도란도란 그의 삶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할머니의 모습.
삶의 고비마다 치열하지 않은 때가 있었으랴마는 험한 고개를 넘어 이제 본향에 다다른 그의 목소리는 완만하고 부드럽다. 그의 성찰은 지혜가 가득하고 그의 시선은 따뜻하다. 여전히 치열한 삶에 허덕이는 우리들은 그의 이야기 속에서만이라도 삶이 넉넉해지는 듯 하다.
그의 이야기는 여느 할머니들의 지난 날을 추억하는 목소리와는 사뭇 다르다. 청년의 촌철살인이 숨어있고, 세월의 강에서 낚아 올린 지혜의 시어들이 펄떡인다.
나도 이젠 중년의 나이에 접어들고 이제야 보이기 시작하는 삶의 진리들이 있다. 그 보석들을 그의 이야기에서 마주하게 될 때 참 반갑고 가슴두근거리는 일이기도 하였다. 그 시간들이 행복했다.
그의 글을 다시 읽어보는 일 또한 큰 행복이다.
곧 형편이 나은 자식은 덜 주고 어려운 자식은 더 주는 식으로 지혜롭게 타협할 것이다. 그들이 이 좋은 날 추수하고 있는 건 낟알이 아니라 세월이기 때문이다.
사람은 속절없이 늙어가는데 계절은 무엇하러 억만년을 늙을 줄 모르고 해마다 사람 마음을 달뜨게 하는가
시간, 지는 형체도 마디도 없으면서 우리 몸엔 어김없이 마디를 긋고 지나가는구나.
뉘 집에서 김치나 부추 부침처럼 이웃에 냄새를 풍길 별식을 할 때면 으레 넉넉히 부쳐서 나누어 먹었다. 그러나 월급날 고기 근이라도 사게 되면 아이들이 아무리 숯불 피워 구워 먹고 싶어해도 어른들은 냄새나지 않게 냄비에 볶아 먹자고 했다. 나눌 수 없는 건 냄새라도 안 피우려는 이웃간의 배려가 즉 정이 아니었을까. 우린 이런 정으로 가난을 건넜다.
하느님이 세상을 지으셨다면 이렇게 불공평할 리가 없다고들 하지만 삶의 속내를 알고 보면 섬뜩하도록 공평한 세상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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