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시절 내가 살았던 고향집에는 내가 읽을만한 책이 한권도 없었다. 그나마 초등학교에서 여름방학기간중에 학교도서관을 일정시간 개방하여 책을 읽고 독서감상문을 제출하던 '독서교실'은 4학년부터 6학년까지만 해당되었다.
텔레비젼도 없던 시절 어딜 둘러봐도 산과 들밖에 없는 지루한 산골동네, 그 현실을 넘어서게 하는 건 책밖에 없었는데, 그나마도 우리집엔 하나도 없었고 친구집에 놀러가면 한 두권씩 볼 수 있어서 친구집에만 가면 쪼그리고 앉아 책읽기에 바빴었다.
그러던 초등학교 3학년 겨울방학에 나와 우리아버지, 그리고 큰 외삼촌과 막내아들과 함께 부산에 계시는 육군장교인 작은 외삼촌댁에 가게 되었다. 그날밤 외삼촌댁의 방 한쪽 벽을 가득메운 동화책이며 온갖 종류의 책을 보고 나는 깜짝 놀랐고, 그 자리에 그대로 앉아서 밤새워 동화책들을 마구 먹어치우듯이 읽었다.
그때부터 내겐 책보다 좋은 것이 없어 보였다. 4학년때부터 여름방학이면 '독서학교'에 빠짐없이 등록하였고, 아침 일찍 소를 몰고 풀 많은 언덕밑에 묶어두고는 학교에 갔다. 학교에서 책을 읽고 또 빌릴 수 있는대로 빌려갖고 집으로 돌아와서는 친구와 같이 소를 몰고 풀 많은 곳으로 자리를 옮겨서 둘다 독서삼매경에 빠져들었다. 가끔씩 소가 어디쯤에서 풀을 뜯는지 힐끔힐끔 보며 읽다가 소를 놓치기도하면서 해지고 땅거미가 내려앉을때쯤 누구네 소가 배가 더 많이 불렀는지 비교하며 만족해 하기도, 속상해 하기도 하면서 집으로 돌아오곤 했다.
6학년때였던가 한동네에 사는 먼 친척집에 갔는데, 나보다 훨씬 나이많은 언니,오빠들이 있어서 그런지 제법 수준높은 책들이 많았다. 카네기인생론, 지와사랑, 러브스토리 등. 특히 '카네기인생론'을 읽고 나는 무척 놀랐다. 모든 사람들을 있는 그대로 순수하게 대하던 초등학교 6학년 꼬마가 처세론적 책을 보고는 모든 눈에 보이는 것들을 재해석하게 되고 많은 생각을 하게되었다. 어떻게 보면 세상을 좀더 쉽게 살아갈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도 한 것 같다.
대학때 참 많은 책을 읽었었다. 주로 사람들에게 빠졌던 것 같다. 우연히 알게된 작품에서 작가의 매력에 빠지게되고 그 사람이 쓴 책을 찾아 읽는 식으로 독서를 했었다. 루이제 린저, 헤르만 헤세, 전혜린, 강석경, 이문열, 이외수, 이광수 등 영문학을 전공했지만 영문학에는 관심이 없었고, 독문학에 빠졌었다.
결혼하여 아이를 낳고 아이 키우는 것도 책을보면 잘할 수 있겠거니 생각하고 도서관에서 육아와 교육에 관한 책을 닥치는 대로 읽었다. 시간만 나면 아이들을 업고 걸려서 가까운 시립도서관에 찾아갔다. 가방에 김밥, 과일, 과자등을 챙겨넣고 소풍가듯 도서관에 찾아갔다. 아이들에게는 동화책을, 나는 육아교육관련 책을 대출할 수 있는 최대한으로 빌려서 나무그늘 밑 벤치에 앉아 시간을 보냈다. 내 책을 읽기도 하고 아이들에게 읽어주기도하며 배고프면 즐겁게 먹기도하며 책읽는 도서관이 얼마나 즐거운 곳인가를 아이들에게 체험시켜준다고 나름대로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아이 키우는 일은 마음먹은대로 되는 일이 아니었다. 교육관련 책은 수없이 많이 읽었지만 내 머리속에 떠오르는 생각은 "책에서는 이렇게 하라는데 나는 아이들에게 이렇게 밖에 못했네. 우리아이들은 장래에 어떻게 될까? " 책을 읽고 내게 남는 것은 이러한 자책뿐이었다. 차라리 책 읽을 시간에 아이들과 시간을 보내고 영양있는 음식을 준비하여 먹이고 쾌적한 집안 환경을 만들어 준다면 더 좋은 엄마, 아이들에게 더 좋은 영향을 주지 않았을까?
이제까지 책은 온갖 이로운 점만을 제공한다고 생각했는데, 내게 있어 육아교육책은 실제적으로 무슨 의미가 있을까? 어머니는 이론으로 되는게 아니고 타고난 어머니의 본능으로도 충분한 사랑을 줄 수 있지 않을까? 여자가 일생을 살동안 자신을 위하지 않고 타인을 위해 행동해야할 시간, 아이들을 키우는 시간이리라. 나는 그때 이론이 아닌 어머니의 사랑으로 행동을 했으면 좋았을걸. 적어도 많은 책을 읽기보다 실천할 한가지만 선택하여 행동함으로서 더 많은 사랑을 아이들에게 전달했으면 좋았을걸. 아직 아이들의 삶에 대해 결론 지을 때는 아니다. 어쩌면 그 모든 과정을 통하여 선한 결말을 이루시는 분의 손길속에 내게 주어진 길을 걸어왔는지도 모르지만 내게 스스로 중간평가를 해볼 때 그런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다.
요즘은 기독교 서적을 주로 읽는다. 그것이 또한 나의 믿음을 성장시켜주는 건 아니라는 것도 안다.
그러나 어찌 책을 놓으랴. 내게 있어서 독서는 결코 나를 떠나지 않을 영원한 친구인 것을. 나에 대해 가장 잘 알고, 나와 가장 닮았고 어쩌면 나보다도 나를 더 잘 아는 친구. 내가 그를 떠나지 않는한 그는 결코 나를 떠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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