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 강가에서

매일의 치열한 일상 속에서도 저녁 강가처럼 하루를 돌아볼 수 있다면...

가족 그리고 나

자판기 커피에 대한 추억 그리고...

안동꿈 2011. 4. 5. 07:00

고등학교를 졸업하면서 공식적으로 커피를 마셔댔다.

자판기 커피로 시작하여 자판기 커피맛에 길들어졌고, 자판기 커피가 최고인줄 알고 지내왔다. 평생에 마신 커피 중에 자판기 커피가 5할이 넘지 싶다.

 

버스 쿠폰과 자판기 커피값이 같았다. 100원이었다. 열 개짜리 버스쿠폰이 한 장씩 떨어져 나갈때 그 아쉬움을 이루 말로 표현할 길이 없었는데, 커피 자판기 앞에서 500원 동전 넣고 주위 친구들에게 후하게 인심을 썼던걸 보면 가난한 시절에도 낭만에 대한 값은 기꺼이 치룰 용의가 있었던 것 같다. 

 

친구들과 가끔씩 한끼 식사값보다 비싼 커피를 마시러 간 적도 있었지만, 그때마다 자판기 커피가 생각난건 가난한 대학생의 구겨진 낭만이 호사스러운 곳에서는 웬만큼 고개를 쳐들지 않은 탓이라고 해두자.

 

자판기 커피 한잔씩 빼들고 친구랑 둘이서 빈 강의실에 앉으면, 머리속에서 복잡하게 엉켜있던 인생의 의문들이 조금씩 제자리를 찾아가는 듯 하였고, 서로의 이야기가 무르익으면서 고뇌에 차있던 철학이 맑은 얼굴로 다가오곤 했다.

 

그때나 지금이나 공허한 시간들을 채우기 위해 홀짝홀짝 커피를 마셔댔고, 무의식중에 늘어난 커피에 대한 경고 신호가 속쓰림으로 다가 왔다. 그러면 친구들에게 선포를 했다. '나 오늘부터 커피, 하루에 한 잔만 마신다.' 그런 후 며칠을 못가서 또 슬그머니 커피는 늘어나 있곤 했다. 마치 술꾼이 술 끊겠다고 선언하는 것이 꼭 내 꼴과 흡사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요즘은 사무실마다 커피믹스를 선호하는 것 같다. 잘은 몰라도 자판기 커피에 물들은 우리들의 입에 딱 들어맞은게 아닌가 싶다. 나는 최근까지도 한 회사의 커피믹스외에는 손도 데지 않았다. '나는 여전히 이 다방커피 스타일이 좋아.아마 앞으로도 절대 안 바뀔거야.' 하면서...그런데 어느날 누군가가 건넨 한 잔의 베트남 원두커피에 이십여년간의 자판기 커피 의리를 등지고 말았다. 그 고소한 커피 향기를 맡고 있으면 마음의 모든 분주함이 평정을 찾았고, 몸의 모든 부위들이 편안해졌다.

 

굳이 결론을 짓자면 청년의 때엔 자판기 커피에서도 낭만이 비집고 나올 수 있었지만 이젠 고상한 커피향이 아니고는 낭만은 얼씬도 않는다. 또 비유를 하자면 젊은날 깡소주에서 와인으로 기호가 바뀌듯 내 나이 마흔 중반에 커피 기호가 바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