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퇴근하여 집에 돌아오니 피아노 위에 못보던 악보가 하나 올려져 있었다. '아 목동아'와 'caro mio ben(오 내 사랑)' 이었다. 보아하니, 고 2인 큰 딸의 음악 실기시험 노래인 것 같았다. '까로미오 벤'을 보니, 가슴이 마구 뛰었다. 26년이나 지났는데, 그 이탈리아 원어가 하나도 안 잊혀지고 그대로 기억이 났다. 딸에게 '엄마도 고 2때 시험친 곡'이라고 흥분되서 얘기했더니, 자기네는 몇 명이 함께 부른다고 한다. 그러면서 대입과 관련이 없어서 다들 신경 안쓴다고 한다.
딸의 말에 여러 생각이 교차했지만, 구구절절이 늘어 놓고 싶은 마음은 없다. 분명 우리때보다는 각박하고 멋없다는 생각은 들었다. 그리고 나와 우리 세대가 그 책임에서 제외될 수 없는 것도 사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26년전 고등학교 2학년때 음악 실기시험이 'caro mio ben'을 원어로 외워서 부르는 것이었다. 많이 연습했었다. 등교하며, 하교하며, 자취방에서, 학교에서... 반복하여 외웠었다. 비록 발음은 좋지 못했고, 특히 'languisce il cor(..코르)..., so spira ognor(...뇨오르), tanto rigor(..리고르)' 혀를 굴려서 발음을 해야하는 부분은 아무리 연습해도 잘 되지 않았다. 음악선생님은 그부분을 특히 강조하셨는데도 말이다.
그때 우리반에는 노래를 정말 잘하는 친구가 있었다. 그때는 고교생들의 성악 콩쿠르가 자주 있었는데, 그 친구는 늘 1등을 차지하곤 했었다. 그 친구가 TV에 출연하는 날은 야자(야간자율학습)하다가 TV 앞에 선생님과 전교생이 모여서 같이 보곤 했었다. 그 친구에게 이 실기시험은 아무것도 아니었을 것이다. 우리는, 아니 나는 자다가도 일어나면 그 노래 가사가 흘러나온 후에야 정신을 차리는 험난한(?) 여정을 끝내고 치른 시험인데, 그 친구는 그 어려운 혀 굴리는 소리도 선생님 시범 보다도 더 아름답게 소화하면서 해치우고서 최고점수를 받았다. 당연한 결과였고, 모두의 예상했던 바다. 그리고 나도 그간의 많은 연습이 노래에 묻어났는지 선생님이 좋은 점수를 주셨다.
그때가 1학기말쯤이었던 것 같다. 최종 기말시험결과가 나왔을때 우리반에서 나의 음악점수가 가장 높았다. 물론 실기와 필기를 합한 점수였기 때문이다. 나는 무척 감격스러웠다. 음악에 있어서는 독보적인 존재인 그 친구를 제쳤다는것에 대해 나는 스스로에게 특별한 의미를 두었던 것 같다. 그래서 그 많은 시간이 지난 지금도 'caro mio ben'은 내게 고마운 노래가 되어 여전히 전체 가사를 고스란히 외우는 성의를 몸으로 간직하고 있나보다.
딸의 실기시험 이야기가 나왔을때 나는 나의 이 좋은 추억을 흥분하여 얘기했는데, 남편과 딸들의 반응은 시큰둥하다.
'엄마, 그거 한 열번만 더 들으면 백번이거든...'
'아고아고 미안미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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