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 강가에서

매일의 치열한 일상 속에서도 저녁 강가처럼 하루를 돌아볼 수 있다면...

가족 그리고 나

우리 엄마 이야기

안동꿈 2012. 2. 4. 16:35

명절연휴 지난 첫 출근날 점심시간이었다. 구내식당에서 무료로 쏜 떡국을 먹으며 각자의 머리속에 가득한 설연휴 동안 있었던 이야기들로 한껏 수다가 그치지 않았다. 그 수다는 식사가 끝나고 사무실에 와서도 이어졌다. 나는 이런저런 가족들 얘기를 듣던중 불현듯 정말 고생하다 돌아가신 친정 엄마 생각이 나 속사포처럼 그 얘기를 쏟아냈다.

 

우리 엄마는 시집온지 몇 달만에 할아버지가 교통사고를 당하셔서 거동을 못하시게 되어 할아버지 돌아가실때까지 20여년의 세월동안 그 수발을 다 하셨다. 그 공로를 인정받으셔서 나라에서 주는 효부상을 받기도 하셨다. 우리 아버지는 바쁜 농사철에는 정말 사람이 저 정도로 일할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엄청난 일을 감당하지만 농사일이 없는 겨울철의 그 한가한 시간을 못견뎌하셨다. 그 시간들을 술과 노름으로 허비하며 자신과 가족들을 힘들게 하셔서 할아버지와 자주 다투시다가 도시로 객지 생활을 떠나셨다. 1년에 두번있는 명절이면 선물 꾸러미들을 들고 오시는 것 외에 가족과 떨어져 몸과 마음고생을 나름대로 많이 하셨다.

 

엄마는 시아버지 수발과 자식들 챙기며 남은 농사일을 혼자 맡아 하시면서 정말 과부아닌 과부생활을 하셨다. 나는 엄마가 주무시는걸 거의 본 적이 없다. 손가락은 일년 열두달 갈라져 피가 맺혀 있었고 거칠어 늙은 고목나무껍질과 같아서 어쩌다가 우리 몸에 스치면 상처가 날 지경이었다. 손톱은 깎는 것이 아니라 닳아 없어져서 손톱이 손가락을 전혀 보호해 주지 못했으니 그 손가락 끝의 고통이 말이 아니었다. 지금도 나는 이 세상에서 우리 엄마 만큼 고생한 사람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이 모든 엄마에 대한 안타까운 마음이 어릴땐 깨닫지 못했다. 아마 어릴때 조금이라도 깨달았다면 소위 말하는 더 훌륭한 사람이 되어있지 않았을까 싶다.  

 

엄마에 대한 기억중 우리 엄마답지 않은 기억이 한가지 있다.

어느날 다락에 올라가서 이것저것 정리하던중 엄마가 쓴 것으로 보이는 편지가 발견되었다. '그리운 당신께'로 시작하는 그 편지는 아버지에게 쓴 것인데 부치지 못한 것 같았다. 엄마는 여자라는 이유로 초등학교도 못 다녔지만 그 당시 서울까지 대학을 보낸 남동생이 있었으니 어깨 너머로 글을 익힌 것과 교육에 대한 생각은 남달랐던 것 같다.  엄마의 그 편지는 내게 적잖은 마음의 울림을 주었다. 엄마는 몸뿐 아니라 마음마저도 무쇠와 같이 강할 것으로만 생각했었는데 그런 보드라운 마음이 우리 엄마에게도 있다는 것이 내겐 충격이었던 것 같다.  

 

내가 중학교를 졸업하고 시내 고등학교에 진학하면서 엄마와 떨어져 생활할때 엄마에 대한 생각이 가장 애틋하던 때였다. 보고 싶고 몹시 그리워도 인내하여야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있다고 자신을 달래며 지내던 중 갑작스럽게 엄마가 돌아가신 것이다. 그 아깝고 안타까운 마음을 어찌 말로 다 표현할 수 있겠는가. 그 보고싶은 걸 참고 참았던 안타까움이 눈물로 흘러내리길 거의 10여년을 했을까. 이제야 웃으며 그때 일을 얘기할 수 있게 되었다며 이야기를 마무리 짓는데 얘기를 듣고 있던 동료들이 슬슬 자기 자리로 돌아가며 눈물을 몰래 훔치는 것이다. 

 

그 중에 한 여자 동료는 고향에 혼자 계시는 자신의 엄마 생각이 난다며 제법 강한 어투로 '요즘 여자들 명절후유증 어쩌고 하는데 옛날 우리 엄마들 고생한 것에 비하면 정말 편하게 사는 것이다.'라며 요즘 며느리들의 강한 성찰이 내포된 아주 바람직한 결말로 마무리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