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물건을 싼 비닐봉지나 보자기의 매듭을 풀면서 고생한 경험이 많다. 보자기는 그렇다치고 어차피 버릴 비닐봉지를 굳이 힘들여 푸는 것이 맞나 싶다가도 매듭을 풀고 나면 마음이 시원해지고 기분이 좋아져서 끝까지 매듭을 풀려고 애를 쓴다.
나는 비닐봉지의 매듭이 가위로 댕강 잘려진 걸 보는게 몹시 언짢다. 그래서 작은 비닐봉지라도 또 아무리 꽁꽁 묶여 있어도 끝까지 풀어 낸다. 내가 매듭푸는 일에 이렇게 집착하는 건 사람들을 대하는 나의 성격과 깊은 연관이 있지 않나 생각하게 되었다.
주위에서 서로 크게 다툰 후에 절교하는 사람들을 종종 보게 된다. 절교라는 건 아주 가까웠던 사람들과 맞게 되는 관계다. 그렇다면 그들은 어차피 서로 만나게 되어 있어서 생활하면서 많은 불편을 겪을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그런 불편을 감수하면서도 그 매듭을 플려고 하지 않는 것이 내게는 더 어리석어 보인다.
나는 누군가와 서로 의견이 다르거나 다투고 난 후에 상대방과 곧 화해할 방법을 즉시 모색한다. 내게는 자존심 보다는 그 불편한 관계가 더 견디기 어렵고 비효율적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언젠가 친구가 내게 '현실주의자' 라는 별명을 붙여준 것도 같다. 매듭은 풀기 전과 푼 후의 느낌이 확연히 다르다. 풀어지기 전에는 푼 후의 상황을 전혀 예측하기 어려울 정도로 고통스럽고 힘이 든다. 그래서 포기하고도 싶다. 그러나 매듭을 푼 후에는 정말 잘했다 싶고, 그 고통의 수고는 후의 만족감의 풍성함에 비할 수 없을 정도의 작은 댓가로 여겨진다.
얼마 전 직장에서 업무 관련 회의시간이었다. 다른 팀 여직원이 우리 팀과 나의 업무에 대해 불만을 섞어 우리의 업무처리로 인해 자기가 힘이든다는 등의 말을 했다. 그리고 우리 팀이 내놓은 새로운 시책에 대해서도 반대 의견을 늘어 놓았다. 물론 나는 이 업무를 맡은 지 며칠 되지 않아 그 부분에 대한 전적인 책임을 질 형편은 아니었지만 우리 팀장이 많이 언찮아 보였다. 회의 후에 불쾌한 마음이 좀처럼 가시지 않았고 그 직원이 내게 왜 그런 공격적인 말을 한건지 알 수 없어 고민이 되었다 그러나 반격하기 보다는 그것 마저도 업무를 개선할 기회로 받아들이는 것이 바른 자세라고 여기며 마음을 정리하려고 애를 썼다.
며칠이 지난 후에 이번 인사에 다른 부서에서 온 동료가 그 회의 시간을 언급하면서 '도대체 이 부서는 무슨 콩가루 집안인가, 까마득한 직원이 감히 과 주무한테 그런 식으로 말을 하냐.'하면서 목소리를 높인다. 정작 나는 마음을 정리하였는데 주변 사람들의 그런 생각을 듣게 되니 다시 불편한 마음이 생기고 그 여직원을 대하는 것이 힘이 들었다. 고민을 거듭하다가 그녀의 의견이나 태도의 잘못된 부분도 교정하고 내가 고쳐야 될 부분도 있을 걸로 여기며 대화를 해봐야겠다고 생각하고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어느 날 그 여직원이 긴히 할 말이 있다고 카페에 가서 같이 얘기하고 싶다고 한다. 그녀는 회의시간에 그렇게 한 건 자유롭게 서로 업무에 대해 또 시책에 대해 의견을 개진하는 시간인 줄 알고, 하고 싶은 얘기를 다 했는데 주위에서 그렇게 생각할 줄 몰랐다고 한다. 그녀는 나에 대해 아주 좋은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내가 좋은 사람이라서 과 주무를 맡은 건 여러 모로 유익한데, 전 직원들이 내가 하는 일을 적극적으로 협조해 줄 것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나에 대해 눈치를 보거나 부담이 없었기 때문에 자신의 평소 의견을 거침없이 얘기할 수 있었다고도 한다. 나는 그녀가 어떤 다른 이유가 아니라 순수한 마음으로 한 일임을 알게 되어 그녀의 말을 전적으로 받아들였다. 그리고 앞으로는 서로에게 적극적으로 협조하고 도우겠다고 얘기하면서 훈훈하게 마무리를 지었다.
내가 몹시 불편한 마음이었을 때 대뜸 그 매듭을 끊어 버렸다면 나는 늘 마주치는 동료와 불편한 관계가 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내가 매듭을 풀 좋은 기회를 엿보고 기다리고 있을때 힘은 들었지만, 시간은 내게 매듭을 풀 기회를 제공해 주었다. 매듭을 푸는 것은 매듭을 끊는 것 보다 훨씬 좋은 선택이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