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 강가에서

매일의 치열한 일상 속에서도 저녁 강가처럼 하루를 돌아볼 수 있다면...

가족 그리고 나

나의 가방 보고서

안동꿈 2020. 8. 23. 16:06

삼 십년 가까이 직장을 다니면서 나에게는 시답잖은 가방의 역사가 있다. 삼 년에 한번씩 갈아치워도 열 개는 족히 넘는 가방이 나를 거쳐갔다. 나는 가방 취향이 까다롭지 않다. 책 한 두 권 정도 들어갈 정도의 넉넉한 크기면 된다. 그마저도 정리정돈을 잘 하지 못하는 나는 아침이면 내용물이 위로 올라온 가방을 둘러메고 집을 뛰쳐 나올 때가 자주 있다.

 

나는 내 손으로 가방을 산 것이 몇 안된다.

나를 거쳐간 가방이 열 개 정도 된다고 볼 때 딸들이 두 세번, 남편도 한 두번 정도, 아이들 큰고모가 자기 취향 아니라고 던져 준 게 두어번, 교회 성도가 한 번, 내가 직접 산 것이 두어번 그 정도가 될 것 같다. 가죽제품의 경우 십 년 가까이 쓰기도 하고, 저렴한 가방(주로 내가 산 것)은 1년 정도 쓰면 수명이 다한다. 나는 가방을 이것저것 용도에 맞게 쓰지 못하고 하나를 쓰면 낡아 버릴 때까지 쓴다. 필요한 것들이 가방에 고스란히 담겨있으니 가방을 바꾸면 밖에서 당황하게 된다. 그래서 가방을 바꾸는 일은 마치 이사하는 것 처럼 하나씩 고민하며 새 가방으로 자리 이동을 시키곤 한다. 그래서 낡아 버릴 때까지 가방을 사용하게 된다. 가방 선물을 자주 받게 되는 이유도 나의 이런 습성 때문일 것이다. 낡은 가방을 들고 다니는 것을 본 가족이나 지인들이 나를 보면 선물 고민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며칠 전에는 직장 후배가 가방을 하나 건낸다. 포장지도 안 뜯은 것이다. 친한 언니가 가방을 사고 보니 마음에 들지 않아 줬는데 자기도 가방이 많아 나 생각이 났단다. 그 가방 주인은 나와도 친한 친구로, 가방 주인에게 양해를 구했더니 선물이 아닌 걸 주게 되어 굉장히 미안해 하더라고 잘 얘기를 하고 주라고 했단다.

 

현재 쓰고 있는 세무가방은 족히 7년은 넘게 사용하고 있던 걸로 지퍼가 고장나 몇 번씩 얼르고 달래며 사용하고 있었다. 너무너무 고마워 그 후배한테 감사를 표했다. 후배에게 내 감격의 가방 역사를 속사포처럼 쏟아내니, 하나님이 나를 통해 언니에게 필요한 가방을 전달하라신 것 같다며 자신의 심부름을 기억해 주란다. 다음날 출근하자마자 가방 주인에게 전화를 했다. 우리는 방방거리며 서로 자기가 더 고맙다고 호들갑을 떨며 이른 아침 정적을 깨뜨렸었다.

 

이렇게 내 가방의 역사는 소박하지만 긍휼과 은혜가 흐르고 있다. 내 가방의 역사만큼 내 삶에도 긍휼과 은혜가 흐른다.

 

 

'가족 그리고 나' 카테고리의 다른 글

가을 골목길  (0) 2020.11.18
큰 딸의 통 큰 선물  (0) 2020.09.12
다시 온천천  (0) 2020.08.14
장미와 찔레꽃  (0) 2020.05.26
코로나19와 예배  (0) 2020.03.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