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고등학교때 국어교과서에 실린 '가난한 날의 행복'이라는 수필이 있었다. 그땐 글 속에서 시험문제만 볼 줄 알았지, 글에서 전해지는 느낌에 마음을 전혀 주지 않았기 때문에 글의 맛을 느끼지 못했다. 많은 세월이 지나 생각나는 학창시절 국어교과서는 가끔 새로운 감동을 자아내기도 한다.
오늘 저녁에 우리집에서는, '가난'이라고 이름 지을 수는 없지만 뭔가 조금 부족한 중에 잠시 행복을 맛볼 수 있었던 일이 있었다. 저녁을 먹은 후 내일 아침을 준비하기 위해 냉장고에서 이것저것 챙기던 중 며칠전에 맛있게 먹고 다 먹은줄 알았던 복숭아가 하나 남아있었다. 깨끗이 씻어서 여러 토막을 내어서 세 접시를 만들어 남편과 아이들에게 나눠주었다. 그랬더니 큰 애가
" 엄마, 아빠껀? 아빠도 줘야한다. 아빠가 복숭아를 얼마나 좋아하는데. 엄마도 있지?"
"응. 아빠도 주고, 엄마도 있다." 평소 무뚝뚝하여 다정스런 말을 잘 할줄 모르는 큰 애에게서 나온 말이라 다소 놀라웠다.
조금 후엔 부엌에 있는 내게 작은 딸이 복숭아 접시를 들고 온다.
" 엄마. 아. 진짜 맛있지?"
하면서 자기 먹을 것도 부족한데 나에게 강제로 먹인다. 가족이 모두 똑같이 나눠 먹은줄 아는 작은 딸에게는 이 한 조각 복숭아가 '엄마는 벌써 다 먹었으니, 더 먹고 싶을 것이다'라는 마음씀씀이에서 나온 것이라서 더욱 기특하였다.
나중에 빈 접시를 들고 나온 남편에게 큰 딸의 아빠 생각하는 마음을 전해주었더니, 더 이상 밝은 표정을 할 수 없을 정도의 환한 표정으로 '정말!' 한다.
넉넉하다면 알 수 없었을 작은 행복을 맛보고, 옛날 국어시간에 읽었던 '왕후의 밥, 걸인의 찬' 이라는 글귀가 문득 생각났다. 우리의 선한 마음은 물질이 풍족하면 들어설 공간을 찾지 못하는 여린 존재가 아닐까. 조금 부족한 공간을 남겨둔다면 그 마음은 충분히 스며들어 우리를 훈훈하게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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