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만논객이라는 TV 프로그램이 있다.
명절에 시댁에 갔더니 아버님께서 보고 계셔서 무심코 앉아서 보게 되었다.
김동길, 김동건, 조영남 이 세 분이 하나의 주제를 가지고 서로 이야기를 나누는 형식으로 진행된다. 세 분이 각각의 개성이 워낙 뚜렷하여 나는 무척 흥미롭게 보았다.
집에서 TV를 거의 안보는 탓에 계속 시청하진 못했지만, 며칠 전 점심식사 후 산책 중에 그 전날 본 낭만논객에 대해 한 동료가 얘기를 한다. 반가운 마음에 '맞지, 맞지' 하며 호들갑을 떨었다. 나이가 몇 살 어린 다른 동료는 자기는 웬 늙은이들이 나와서 얘기하길래 채널을 돌렸고 조영남을 극히 싫어하는 것도 그 프로를 안보는 이유라고 한다. 나는 조영남씨가 자기의 감정에 몰입되어 천방지축 열을 올려 얘기하면 그걸 받아서 김동길교수가 차분히 논리적으로 정리하는 모습이 참 대조적이라고 덧붙였다.
그런데 그 동료는 조영남씨에게 감동받은 얘기를 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그날 슬그머니 얘기를 마무리 짓더니, 며칠 후 저녁에 함께 걸으며 그날 못다한 얘기를 한다. 자신도 조영남씨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고 서두를 띄운 후, 그날 주제는 이별 이야기였는데, 서로의 인생의 구비마다에서 건져올린 이별이야기와 생각들이 풍성하게 오간 후, 조영남씨가 피아노 앞에 앉았고 과거에 김수현씨가 써준 자신의 대표곡 '지금' 을 열창을 하더라는 것이다. 그 곡을 들는데 이제껏 나눈 절절한 이별에 대한 이야기들이 한번에 평정되는 느낌이더라는 것이다.
그 느낌을 알 것 같았다.
조영남. 그는 한마디로 천재다. 노래나 그림이나 그의 타고난 예술적 재능은 아무나 넘볼 수 없는것 같다. 그는 자기가 하고 싶은대로 하면서 산다. 그런 그를 우리는 드러내놓고 싫어하지만 그가 여전히 인정받는 이유는 우리가 감히 드러내놓지 못하는, 그러나 여전히 사랑하는 자신의 본능을 그에게서 발견하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그의 본능대로 사는 모습, 우리는 하고 싶지만 할 수 없는 그 모습을 그대로 인정하고 싶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지금에야 돌아본다.
지난 시절, 한마디로 혈기 왕성하던 때 나는 모범적이고 성실하고 규범 안에 있는 사람들을 무척 싫어했다. 뭔가 틀을 벗어나고, 반항적이고, 즉흥적인 감정에 따라 움직이는 사람들을 선망했다. 어린 마음에 후자가 휠씬 위대해 보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젠 안다. 규범 안에 있는 것, 자신의 길을 정하여 성실하게 앞으로 나아가는 것, 남을 배려하고 늘 평화를 유지하는 것들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본능을 다스리며 옳은 일을 선택하여 행하는 일이 얼마나 고상한지를. 그것은 절대자를 아는 은혜와 거기에 따르는 겸손에 의한 것임을.
그 모습을 나는 김동길 교수에게서 볼 수 있었다.
이제 미수(88세)를 앞둔 그다. 그동안 읽어온 수많은 책과 삶의 경험과 그가 만난 수많은 사람들의 이야기가 녹아 발효되어 퍼 올려질때, 순간의 진실이 드러내는 모순들을 그에게서는 찾아 볼 수가 없다. 그가 들려주는 나지막한 음성의 현자의 언어들이 얼마나 우리들의 마음의 옷깃을 여미게 하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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