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 강가에서

매일의 치열한 일상 속에서도 저녁 강가처럼 하루를 돌아볼 수 있다면...

가족 그리고 나

여든의 카페지기 시아버지

안동꿈 2014. 2. 6. 08:47

설 연휴 첫날

늦은 아침을 먹고 시댁에 빨리 가야한다는 부담감으로 괜히 마음만 분주한 채

오전을 다 보내고 정오가 다 되어서야 시장을 둘러 시댁에 도착했다.

 

시어머니가 미리 준비한 재료들과 내가 시장본 재료들을 부엌에 펼쳐놓고 나물이니, 전이니, 갈비 등 손에 잡히는 대로 너 댓 시간여를 분주히 보내고 나서 저녁 상을 차릴 때쯤이었다. 시아버지가 다급한 목소리로 부르셨다.  

"야야, 일로 와바라. 내가 3시간 동안 꼼짝 않고 쓴 글이 다 날라가게 생겼다."

 

아버님은 은퇴후 인터넷 카페를 열심히 하고 계신다. 그 글중 가끔 오프라인으로 기고도 하셔서 받은 원고료로 용돈으로 쓰시기도 하시니, 컴퓨터가 웬만한 자녀보다 효자다. 그런데 그 효자가 오늘은 심통을 부린 모양이다.

 

아버님께 가보니, 화면에 '서비스 안내' 라는 경고문만 커다랗게 떠있고, 작성하던 글은 사라져 버렸다. 그 경고문을 닫고 나면 영영 되돌릴 수 없을 것 같은 불안에, 그리고 내가 그 불운의 책임자가 되기 싫어서 잘 모르겠다고 하면서 옆 방에 있는 남편을 불러서 떠 넘겼다.

 

다시 부엌으로 돌아와 바쁜 척하면서도 상황이 어떻게 되어가고 있는지 신경이 쓰였다. 남편은 과감하게 경고문은 닫았지만 쓰던 글을 되돌리지는 못한 것 같았고 아버님의 안타까운 부르짓음은 계속되고 있었다.

" 3시간 동안 꼼짝도 안하고 쓴 글인데, 단편소설 한 편이 완성되어 가는 중인데, 이제 결론만 쓰면 되는데..."

모른척 할 수가 없어서 다시 현장으로 가보니, 다시 기억을 더듬어 글을 쓰시려고 그러시는지 당신의 카페에서 글쓰기를 펼쳐놓고 계신다.

 

나는 카페는 해보지 않았지만 블로그를 하기 때문에 오른쪽 위에 자동 저장된 글이 3개가 있는 걸 금방 발견할 수 있었다. 그걸 열어보니 아버님이 오매불망 찾던 글이 남아 있었다. 아버님께 열어보여 주며 이 글이 쓰시던 글이냐고 여쭤보니 맞다고 하시며 너무나 기뻐하신다. 저녁상을 앞에 두고도 너무 기쁜 나머지 입맛도 없으신 모양이다. 저녁 내내, 그리고 새로운 식구들이 도착하는대로 며느리가 내 글을 되찾아줬다고 계속하여 자랑하신다.

 

블로그를 하면서 여러 즐거움이 있는데 이 일은 또 다른 즐거움, 소득 중에 하나가 되었다. 나름대로 명절에 아버님께 드린 큰 선물이 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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